고갱은 프랑스 후기인상파 화가.파리 출생.
1871년 학교를 마치고 상선(商船)의 선원이 되려고 하였으나 어머니의 사망으로 포기하고
증권거래소에서 일하였다.
73년에 덴마크 여인과 결혼하였는데, 그 후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된 고갱은 동료의 권유로
이른바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화필을 들었고, 화랑을 돌아다니면서 당시는 아직 세상에서
인정을 받지 못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수집하였다.
76년 그의 풍경화가 살롱에서 입선되어 C. 피사로와 교제하게 되었고, 80년에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직업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 그는 83년 이후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인상파 계열의 섬세한 필촉(筆觸)이 색채를 누비는 듯한 스타일이었던 그의 화풍이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마르티니크섬에서의 생활과 J.F. 밀레·E. 베르나르 등과의 교제로
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남프랑스의 아를에 있던 고흐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흐의
정신병 발작으로 헤어졌다.
브르타뉴에 돌아와 《천사와 격투하는 야곱(1888)》 《황색(黃色)의 그리스도(1889)》등을
그린 후, 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타히티섬의 순수하고도 격렬한 <살아있는 색채>는 그를 완전히 매혹시켰고, 동시에
그의 화면을 장식적(裝飾的) 색면(色面) 구성으로 독특한 면을 띠게 하였다.
마호리의 집/ 목욕하는 타히티의 여인(1891)/ 언제 시집가나/ 부채를 가진 여인(1892)/
타히티의 여인들(1891∼93)/다만 홀로(1893)/자바 처녀 안나(1893)/노아 노아(1897 등을 그렸다.
1901년 마르케사스제도의 하바오아섬으로 옮겼을 무렵에는 매독과 영양실조로 매우 쇠약했고
1903년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생애를 마쳤다.
후기 작품/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나(1897∼98)/붉은 꽃을 가진 가슴(1899)
해변의 기수(1902)》 등이 있다.
타히티의 풍물에서 취재한 강렬한 화풍은 그 뒤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
The Alyscamps at Arles/고갱(Paul Gauguin) 72*91cm
Flowers and a Bowl of Fruit on] -고갱(Paul Gauguin)
Breton Landscape/고갱(Paul Gauguin)
[Breton Landscape 2] -고갱(Paul Gauguin)
예술가의 어머니(The Artist's Mother)/고갱(Paul Gauguin) -33*41cm 1890년.
고갱은어머니가 젊었을 때 찍은 사진을 토대로 이 초상화를 그렸다.
어머니가 페루 출신이었듯 미를 강조했다. 고갱의 어머니는 페루 도기를 수집했는데
이는 고갱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끼쳤다
나부습작(裸婦習作,Study of a Nude)/고갱(Paul Gauguin) -79.5*111.4cm
고갱은 일요화가(日曜畵家)로서 코로나 쿠르베의 영향에 의한 그림을 그리다가
1874년 피사로와 만나 차츰 당시의 파리 화단에 물결치고 있던 인상파(印象派)의
화론(畵論)에 공감하여 갔다.
이 작품은 1881년 제6회 인상파전(印象派展)에 출품되었는데 그때 유이스만스의
격찬을 받아 하나의 일요화가에 지나지 않던 고갱의 이름을 크게 높이는데
성공한 그림이다. 유이스만스는 '조금 부풀은 듯한 허벅지에 이어져 있는 하복부나
그늘진 으슥하게 된 둥근 유방 아래의 잔주름, 다소 메마른 무릎의 관절이나
손목의 볼쏙한 부분 등은 얼마나 많은 진실이 담겨져 있는 것이겠느냐'라고 했지만
확실히 여기에는 알몸 그 자체에 접근 하려는 일종의 생생한 욕구가 느껴진다.
그림의 모델은 고갱 집의 가정부로서 젊을 때엔 들라크로아의 모델을 한 적도 있었다.
아베 마리아(Hail Mary)/고갱(Paul Gauguin) 87.7*113.7cm 1891년.
고갱은 타히티 섬에서 그린 가장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
자신한 이 그림을 뤽상부르 박물관에 기증하려 했지만 거절당하고 만다.
고갱은 성서의 한 대목을 시공간이 전혀 다른 세계에 이식하여 원주민의
신앙심을 그려내고 있다.
테하마나의 선조(Merahi Metua No Teha'amana)/고갱(Paul Gauguin) 54*76cm1893년.
그림의 여인은 고갱이 꿈꾸던 야만의 이브라고 할 수 있다. 이 여인은 고갱의 정부로
<마나오 투파파우(그녀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생각한다)><망고를 든 여인>등에
등장한다
야회복을 입은 메트 고갱 (Madame Mette Gauguin in Evening Dress)/고갱
(Paul Gauguin)
고갱은 1873년 11월, 23살의 덴마크 여성 메트와 결혼 했다. 결혼 전 어느
편지에서 그녀의 강한 성격과 고귀한 감정에 대하여 '이렇게 아름다운 진주를
덴마크로부터 뺏어 오기 위하여 나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작정입니다.'
고 했지만, 결혼 후 북구(北區)의 프로테스 탄트풍(風)의 엄격한 윤리관에 젖어 있는
그녀와 고갱과의 생활은 순탄하지 않았다.
만약 그녀의 남편이 고갱 이외의 다른 남자였다면 훌륭한 부인으로 살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고갱이 고갱 자신으로 돌아 감에 따라 그녀도 자신을 드러내어
자제하지를 못하였다. 이 작품은 그가 본격적인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베르탕
상점을 그만둔 다음 해에 르왕에서 그린 것인데 인상파적인 수법으로 그녀의 그런
기질(氣質)을 잘 나타내고 있다.
초상화에서 이런 투시력(透視力)은 고갱 시각(視覺)의 독특한 성질의 하나일 것이다.
브르타뉴의 네 여인(Four Breton Women)/고갱(Paul Gauguin) -90*72cm 1886년.
고갱의 천재성이 움트는 작품이다. 하얀 머릿수건은 세부 묘사의 차원을 넘어 순수한
장식적 특징을 갖는다. 비틀린 팔 동작과 시선에서 어떤 신비가 느껴진다.
그녀는 죽은 자의 영혼을 생각한다(Manao Tupapau)/고갱(Paul Gauguin) -92.4*72.4cm
1892년. 상단 부분에 원제가 보인다. 타히티 원주민의 신화를 바탕으로 그린 이 그림에 피사로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지만, 드가는 강렬한 색채와 이국적 화풍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그림 속의 모델은 고갱이 2년 동안 동거했던 '테하마나(테후라)'다
장날/ 고갱(Paul Gauguin) 91.5*73cm 1892년작.
캔버스 위에 유채. 73 x 91.5cm. 스위스 바젤미술관 소장.
젊은 창녀들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으로 이집트의 벽화을
연상하게 하는 그림이다.
세 명의 타히티인(Three Tahitians)/고갱(Paul Gauguin) 93*73cm 1898년.
세 명의 타히티인은 V자 형태의 안정된 구도 속에, 고대 문명의 장식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인위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다.
고갱의 장식주의의 일면을 엿볼 수 있는작품으로, 배경도 장식적인 기능을
살려 평면 처리했다.
이와 같은 배경 처리는 당시 고갱이 즐겨 쓰던 기법이다.
망고 꽃은 든 타이티 여인들 (빨간 꽃과 유방,Two Tahitian Women with Mango)/고갱
(Paul Gauguin) -73*94cm
이 작품은 고갱의 타히티 작품 중 가장 자연스러운 것 중의 하나이다. 대부분의
작품이 의식적인 그의 원시주의적(原始主義的) 조형 의지를 담고 있다면 이 작품은
그런 의식을 떠나서 간결한 구도로 인공적(人工的)인 단순화(單純化)나 양식화(樣式化)의
흔적도 없이, 두 여인의 포즈에도 고갱이 가끔 쓰는 자바나 이집트의 그 양식도 볼 수가 없다.
젊고, 그래서 아름다운 매력을 몸 속에 가득히 지니고 자연스럽게 서 있다.
그것은 유럽인이 꿈꾸어 오던 이브(Eve)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 반대적 이브도 아니다.
그런 대립을 뛰어넘은, 싱싱한 한 현실로서의 여체(女體)인 것이다. 빨간 꽃과 젖꼭지
입술 등의 색에서,오렌지빛, 노랑, 그리고 청록의 밝은 치마에서 차츰 어두운 암록색 검정의
머리칼과 치마색까지 차분한 하모니를 이루고 화면은 풍부하고 투명한 아름다움으로 가득 찼다.
꽃을 가진 여인(Vahine No Te Tiare,Woman with a
Flower ) 고갱(Paul Gauguin
고갱이 타히티에 도착하여 얼마간 지난 후에 그린 작품으로, 간혹 그의
오두막집에 찾아오곤 하던 이웃 여인을 모델로 하고 있다. '그녀는 예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이는 구라파적 기준에서 보았을 때 그럴 뿐이다.
어쨌든 역시 아름다운 것이다.